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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2월 18, 2013

축적을 위한 인지혁명에서 공통되기를 위한 인지혁명으로

–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신자유주의로 불려온 양극적 경제는 오늘날 깊은 침체에 빠져있다. 이 경제의 견인차였던 미국과 일본의 현 상태가 보여주듯이 이 경제는 지난 20년간 짧은 붐과 긴 침체를 거듭해 왔으며 2008년 이후에는 공황 상태에서 헤매고 있다. 이것은 발전의 지체의 결과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보 흐름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너무 복잡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해독하고 예측할 능력이 부족할 때, 그래서 그것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을 때 공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공황의 상황에서는 욕망이 투자를 거부하게 되고 이 투자 거부가 침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침체와 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성장의 재개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이곤 한다. 그것을 위해서 금융화에서 산업화로의 유턴이 필요하다는 신케인즈주의 노선과, 지금까지의 금융화와 부동산 투기에의 호소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신보수주의 노선 사이의 논쟁이 가열되곤 한다. 과연 재산업화나 금융화/투기화가 현재의 일반적 공황상태를 극복할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경제적 붕괴는 경제적 사유, 경제적 도구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지배적 경제담론에서는 성장의 재개만이 불황의 극복 방안이라고 주장되지만 성장을 재개할 에너지는 고갈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은 국가의 산업적 군사적 재정지출을 통해, 다시 말해 집단적 부채를 통해 극복되었지만 오늘날 집단적 부채는 붕괴나 전복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추가로 지불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사실은 아일랜드, 그리이스,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수 십 조 달러의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세계 최대의 부채대국이 된 제국의 군주국 미국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구생태도 자본주의의 새로운 확장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대기오염, 오존층파괴, 온난화 등으로 인해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자연이 제공해 주던 삶의 안전 수준을 획득하는 데에만도 거대한 비용이 들고 있다. 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은 질병과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 이해관계는 생태보존의 요구와 부단히 상충한다. 기후정상회담이 계속 겉돌고 빈소리로 일관되고 있는 현실은 이 사실을 증언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현재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 요구가 실현 가능성도 없으려니와 바람직한 방안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생태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낳는 문제의 치료제로서 탈성장을 제안해 왔다. 그런데 탈성장은 지금은 성취해야할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이자 통증이다. 도처에서 국민총생산이 하락하고 있고 성장이 둔화되며 수요가 주저앉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지적 능력을 축적원천으로 삼아온 지난 30년의 귀결이 바로 탈성장이다. 그렇다면 인지의 폐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니다. 인지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궁지에 몰린 지금 지금이야말로 인지의 진정한 혁명이 필요하다. 축적을 위한 인지의 사용이 아니라 삶의 혁신을 위한 인지혁명이 필요한 때이다. 부를 구매력과 동일시하고, 쾌락을 소유와 동일시하며, 노동과 소득 사이에 엄격한 상관관계를 설정하고, 성장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지금까지의 경제주의적 인지양식을 해체하고 부와 쾌, 그리고 행복에 대한 질적으로 다른 인지양식을 창출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오늘날 경제적 침체depression와 심리적 우울depression의 중첩, 노동의 불안정과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에 만연된 심리적 불안감의 중첩이라는 병리적 현실에 대한 실제적 치유를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치유작업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을, 문화와 정동들의 재특이화를, 서비스 및 재화의 탈사유화를 필요로 한다. 지성은 축적을 위한 일반지성 형태, 즉 지성의 자본주의적 배치에서 벗어나 재특이화함으로써 자유를 위한 공통지성, 즉 다중지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정동도 한편에서도 중독, 다른 한편에서는 기피라는 두 얼굴의 일반감정 형태들에서 벗어나 존재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는 특이한 정동들을 구성해야 한다. 일반지성과 일반감정에서 벗어나는 특이한 인지적 기념비들의 창조를 통해 중독과 기피의 무력상태를 타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행복과 사적 소유를 동일시하는 편집증에서 벗어나 인간적 저항의 자율지대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이테크이지만 저에너지인 모델에 기초한 생산의 자율적 형식들을 실험하고 정치적 언어보다 치유적 언어로 말하는 습관을 조성하는 영구문화혁명을 전개해야 한다.

사람들이 공황과 무기력과 절망에 빠져있는 것은 자신들이 지금의 이 탈성장 경제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냉소적 감정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혁명은 재특이화의 길로 나아가는 다중들이 지금까지의 성장경제의 진실을 직시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트라우마를 스스로 돌보는 가운데 생성될 일종의 “치유적 전염 지대”(therapeutic contagion)를 확대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다.

특이성들의 공통되기를 통해 활성화될 이 치유적 문화혁명의 정치는 현재의 인지자본주의가 가져오는 공포, 불안, 우울의 정서들을 역전시키면서 개체적 집단적 기쁨을 산출하는 정치이다. 스피노자는 수동적 슬픔의 경험에서부터 기쁨의 요소들(타당한 관념들과 적합한 정념들)을 추출하고 결합하여 그것을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시키는 공통관념의 정치학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게서 기쁨은 신체와 정신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는 정동적 자극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쁨의 구축은 슬픔(공황, 조울, 불안)의 인지상태를 극복하게 하는 치유과정에 다름 아닌데 이 과정은 슬픔의 수동상태에서부터 능동적 기쁨으로 전환될 요소들을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의 한 예를 네그리와 하트에 의한 가난과 사랑의 개념혁신 작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가난에서 궁핍, 불행, 혐오만을 읽는 인지적 습관에 도전하면서 가난을 생산성과 가능성의 힘으로 번역하려 한다. 이들은 가난의 개념을 통해 임금 관계 안팎에서 형성된 광범위한 생산적 주체성을 파악하고자 하며 가난을 결여가 아니라 가능성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 이주자들, 불안정노동자들은 분명 세계자본주의에서 배제된 자들이다. 하지만 네그리와 하트는 이들이야말로 전 지구적인 삶정치적 생산 리듬의 내부에서 공통된 세계를 생산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힘임을 인지하려 한다.

사랑은 혁신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개념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공통적인 것의 힘과 생산성을 탐구하는 또 다른 경로가 사랑에 의해 주어진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사랑은 가난과 발명에서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차이에 의해 정의되는 생성의 힘이라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사랑은 공통적인 것을 확장하여 자유화의 과정을 향하도록 만드는 풍부함의 힘에 다름 아닌데, 이런 의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의 사랑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우정의 개념과 완전히 겹친다.

만약 가난과 사랑의 재개념화가 특이함과 그것들의 공통되기를 추구하는 무기일 수 있다면 무엇이 가난과 사랑을 활성화하는 요소들일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의 첫째 요소는 스피노자가 공통관념을 구축할 이성의 힘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성의 힘은 관계의 반복 속에서 기쁜 수동들을 발견하고 또 발명함으로써 타자와의 새로운 관계 가능성을 구축해 나가는 인지적 혁신의 힘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금까지의 세계자본주의가 확산시키고 공고하게 만든 편집증적이고 광신적인 관점을 해체시키면서 이성의 혁명적 열정이 역사의 언저리에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배 권력들을 정복하고 그것의 부패한 제도들을 해체하는 물리적 정치적 행동이 동시에 필요하다. 재특이화는 결코 관념적 과정일 수 없고 물리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제도들, 문화적으로 구축된 자본의 인지양식들을 감각적 행동으로 와해시키면서 특이성들의 새로운 성좌를 구축하는 것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조직하는 이 물리적 정치적 과정은 앞의 인지적 혁신에 기초해야 한다.

공통되기는 이 두 요소의 결합의 산물이다. 다중을 새로운 신체로, 새로운 군주로 구축하는 이 공통되기의 정치과정은 새로운 총체화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지배를 지엽적인 것으로, 주변적인 것으로 만들어 그것들이 더 이상 지배적인 것으로 되지 못하게끔 만드는 마음들과 신체들의 연합 및 실제적 변형의 길이며 이를 기초로 한 인지적 신체적 치유의 길이다.

From → 네그리, 공통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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